치과의사신문 + 덴탈위키 공동기획 「치과경영 기획연재」 환자는 변했다. 치과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③
역할이 바뀌고, 관계의 시간이 달라지고, 만나는 방식이 달라진다. 관계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설명을 점점 더 줄인다. 이미 아는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설명했다는 것과 이해시켰다는 것
치과에서 간혹 이런 말을 듣는다. “분명 설명드렸는데요.” 반대편에서는 “저는 그렇게 들은 적이 없는데요”라는 말이 나온다.
어느 한쪽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둘 다 그 순간에는 진심일 수 있다. 의료진에게는 분명히 설명한 내용이지만 환자에게는 다르게 남았거나, 중요한 부분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대개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따지느라, 그 다음에 어떻게 다시 설명할지는 놓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설명의 문제를 생각할 때 질문 하나를 더해보고 싶다. 우리는 환자에게 무엇을 이해시켰는가.
이 간극을 살펴본 연구가 있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치과대학은 일반 치과 상담 직후 환자와 담당 치과의사에게 각각 상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독립적으로 기록하게 했다. 표본은 26건으로 크지 않지만, 치과의사는 환자보다 자신이 제공했다고 기억한 구강건강 조언과 향후 치료계획을 더 많이 보고했다.
같은 대화를 두고, 한쪽에는 자신이 설명한 내용이 남고 다른 한쪽에는 자신이 듣고 기억한 내용이 남는다. 녹음을 해서 다시 들어보지 않는 한, 어느 쪽 기억이 더 정확한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그 둘이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질문이 출발하는 자리다.
고지서를 든 사람들
설명에 대해 생각할 때 오래전부터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필자의 지인 중에는 동네 사람들의 백과사전 같은 분이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 준비로 분주한 그 집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은 손에 종이 한 장씩을 쥐고 찾아오곤 했다. 청구서의 내용을 모르거나, 농협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잘 이해가 안 될 때 묻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다 풀지 못한 사연은 퇴근 후에도 이어졌다. 아랫집 아주머니는 집을 나설 때면 곧잘 이렇게 말했다. “참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잘해줘.”
그분이 필자의 부친이다.
지금보다 교육의 기회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훨씬 제한적이던 시절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종이 한 장의 뜻을 풀어주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필요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장면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궁금한 것을 들고 왔고, 이해하고 나면 표정이 달라져 돌아갔다.
지금 돌아보면, 부친이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는 것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살피고, 상대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설명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맞는 말과 농협 일로 찾아온 사람에게 맞는 말은 달랐으니, 정해둔 설명 하나로 모두를 대할 수는 없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의 흐름을 살피고,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며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알아야 했다.
임상을 아는 것과 사람을 읽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좋은 설명에는 둘 다 필요하다.
물론 고지서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과 의료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의료에서 이해는 더 무겁다. 환자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치료를 받을지, 어떤 치료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설명한 것과 이해한 것 사이의 간극은 국내 자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2020년 의료서비스경험조사를 바탕으로 치과 방문 환자 560명을 분석한 국내 연구에서는 환자 만족도에 유의한 영향을 미친 치과의사의 태도로 예의, 불안 공감, 충분한 대화, 그리고 알기 쉬운 설명이 각각 따로 확인됐다. 넷 중 하나만 빠져도 만족도는 흔들렸다. 충분히 대화했다고 느끼는 것과 설명을 알기 쉽다고 느끼는 것은 조사에서도 서로 다른 항목이었다.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환자도 조사 시점의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지난 글에서 정착형 환자는 시간 속에서 계속 달라진다고 했다.
그 변화는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언어와 문화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는 감각과 인지의 조건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구에게 설명하는가
소아과는 2007년 ‘소아청소년과’로 이름을 바꿨다.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아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시간을 의료가 함께 본다는 의미도 그 이름 안에서 읽을 수 있다. 치과의 공식 진료과목 명칭은 여전히 ‘소아치과’다. 가끔 이 이름을 ‘소아청소년치과’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한다.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에 앞서, 그 이름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시간을 한번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일곱 살 아이가 소아치과에 처음 왔다고 해보자.
치료가 필요한 이유와 방법, 비용과 주의사항을 설명할 때 대화의 중심에는 대개 부모가 있다. 아이에게는 두려움을 줄이고 협조를 구하는 설명이 필요하지만, 치료에 관한 많은 정보와 결정은 보호자를 향한다. 그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어 다시 진료실에 앉을 때다. 여전히 부모를 향해서만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팔 년 전 그 아이에게 하던 설명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제는 자신의 구강 상태와 치료가 필요한 이유를 청소년 본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부모와 이야기하며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환자는 그대로인데 나이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설명을 받아들이는 위치가 달라진 것이다.
학계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2026년 대한소아치과학회지에 실린 한 리뷰 논문은 소아치과의 의사결정을 아동, 보호자, 치과진료팀이 함께 참여하는 삼자 구조의 공유의사결정으로 다룬다.
이는 법정에서도 확인된 문제다. 대법원은 2023년,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미성년 환자를 원칙적으로 설명의 상대방으로 본다고 판시했다. 다만 환자 본인이 치료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경우처럼, 보호자를 거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직접 설명이 필요한 사정도 있다고 구분했다.
무슨 언어로 이해하는가
언어와 문화가 다르면 이 문제는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결혼이주여성 건강 연구는 이주여성들이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의료진과의 의사소통 문제, 진료절차에 대한 이해 부족, 의료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결혼이주여성과 치과의료진을 함께 조사한 2022년 한 학위연구는 이 간극을 치과 진료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결혼이주여성은 의료진이 쓰는 전문용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고, 의료진은 자신이 쉽고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여겨 환자가 이해했다고 판단한 채 치료를 진행했다. 이는 이번 글의 첫 질문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법은 통역이다. 하지만 통역은 말을 옮길 뿐,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의료진의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과, 진단과 치료계획, 주의사항과 선택의 의미를 환자가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결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의료코디네이터가 있다면, 의료진의 설명과 환자의 이해 사이를 정확하게 연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의학적 판단은 의료진의 영역이고, 치료를 받을지 말지의 결정은 환자의 몫이다. 코디네이터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의료진의 설명이 환자의 언어와 맥락 안에서 정확히 이해되도록 돕는 데 있다.
어떻게 전달되는가
정착형 환자와 가장 오래 관계를 맺어온 것은 대개 고령 환자다. 그리고 바로 그 익숙함이 함정이 될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 치과를 다닌 환자라는 이유로 늘 같은 속도와 방식으로 설명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이 같은 사람일 리 없는데도, 관계가 길다는 이유로 그 변화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니, 그 변화를 알아채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몇 년째 같은 톤으로 설명해 온 환자에게, 정작 언제부터 잘 들리지 않게 됐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비슷한 관찰이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대한치과의사협회지에 실린 고령 환자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청력 이상과 같은 감각 기능의 변화, 그리고 경우에 따라 동반되는 인지 기능의 저하가 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짚는다. 젊었을 때는 무리 없이 알아듣던 설명도, 청력이나 인지 상태가 달라지면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연구는 노인 환자가 말을 하지 않는 순간조차 무심히 넘기지 말고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 끌어내고 경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런 경우 설명의 장소부터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력이 약한 환자라면, 기구 소리가 울리는 진료실보다 조용한 상담실에서 설명을 다시 하는 것만으로도 전달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침묵을 동의로 읽는 것과 침묵의 이유를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진료다.
연령, 국적, 언어, 인지는 환자를 판단하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시작하는 단서일 뿐이다. 이 단서를 진료실에서 실제로 살리는 방법이 있다.
같은 치료에서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면, 그것을 매번 환자 개인의 이해력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 틀니 치료 후 여러 환자가 적응 과정에서 비슷한 질문을 되풀이한다면, ‘분명 설명했는데’라고 생각하기 전에 그 설명을 어떤 순서와 언어로 하고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반복되는 질문은 때로 환자의 문제가 아니라 설명체계가 보내는 신호다.
컴플레인이 접수된 뒤에야 누가 무엇을 설명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는 늦다. 환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묻거나 상담 후 다시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일이 잦다면, 그것은 이미 작은 컴플레인의 전조일 수 있다.
그 지점을 모아 설명의 순서와 표현, 안내자료와 직원 간 인계에 다시 반영하는 순간, 한 환자의 오해를 그때그때 풀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환자가 같은 지점에서 막히는 일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신호를 계속 넘기면, 나중엔 설명이 아니라 해명을 해야 한다.
개인의 감각에서 조직의 기준으로
설명을 몇몇 원장이나 직원의 감각에 맡겨서는 한계가 있다. 치료의 필요성, 대안, 위험과 주의사항처럼 반드시 설명해야 할 내용은 표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궁금해하는지, 어떤 표현에서 이해가 막히는지, 그 이해를 어떻게 확인할지는 환자마다 다를 수 있다. 표준화해야 할 것은 정보이지 환자가 아니다. 기준과 기록이 없으면,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설명의 맥락도 함께 끊기기 쉽다.
그 이해를 확인하는 방법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설명을 마친 뒤 환자에게 방금 들은 내용을 자신의 말로 한 번 되짚어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서 이해가 끊겼는지가 드러난다. 틀니 사용 시 주의사항을 설명한 뒤라면 이런 질문 하나로도 충분히 드러난다. “처음 틀니를 사용하실 때 어떤 점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이해하셨어요?”
이 표준과 확인은 자리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원장에게는 그 확인 질문을 실제로 던지는 진료 표준의 문제다. 실장에게는 그 질문을 신입 직원에게도 하도록 훈련시키고, 반복되는 오해를 찾아 기준을 고쳐 쓰는 문제다. 진료실 직원에게는 환자가 막혀서 다시 물었던 지점을 다음 사람에게 정확히 넘기는 인계의 문제다.
원장 앞에서는 다시 묻지 못했던 것을, 환자는 직원에게 슬그머니 되묻는 경우가 많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묻고 있다면, 그 병원은 표준이 아니라 우연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원장이 혼자 진료하는 곳이라면 이 세 역할이 한 사람 안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기준이 없으면 결국 그날의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이 왜 필요한지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분명하다.
표준만 있고 개별화가 없으면 형식적인 설명이 되고, 개별화만 있고 표준이 없으면 그날 상담한 사람의 역량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 차트에는 치료계획이 꼼꼼히 남지만, 환자가 어떻게 이해했고 어디서 막혔는지는 대개 기록되지 않는다. 좋은 직원 한 명에게 기대는 치과와 좋은 기준을 가진 치과는 다르다. 사람은 언젠가 떠나지만 기준은 남는다. 이 차이가 왜 가벼운 문제가 아닌지는 실제 분쟁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서명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는 치과의사가 직접 문의한 사례가 공개돼 있다.
“설명이 미흡하였던 치료에 대한 항의가 심합니다.” 반대편에는 환자가 “설명도 없이 치아를 갈아버렸다”고 문제를 제기한 상담 사례도 있다.
중재원은 사랑니 발치와 관련한 설명의무 사례에서 동의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 설명이 형식적이고 관행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환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에 이른 것이었는지에 따라 책임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서명은 설명과 동의의 중요한 기록이지만, 그 자체가 환자의 이해까지 자동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1회에서 이야기했던 실질적 동의라는 말도 결국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치과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충분히 설명했는가를 확인해왔다. 이제 그 다음 질문도 필요하다.
우리는 환자에게 무엇을 이해시켰는가. 그리고 환자는 무엇을 이해했는가. 정확한 임상지식이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면, 환자를 이해하는 시선은 그 설명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가 자신의 진료를 결정할 수 있을 때, 설명은 비로소 진료의 한 과정이 된다. 설명은 서비스가 아니라 진료다.
환자는 바뀌었다. 그것은 설명 방식 하나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진료를 설계하는 기준 자체를 다시 묻는 일이다. 다음 글에서는 치과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 질문을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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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신문 '치과 비즈니스 리뷰'에 연재된 글입니다. 원문 보기